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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스크리닝 — 발레리 티 리

12월 한 달간 벨기에 브뤠셀에서 활동하는 발레리 티 리 작가의 인터뷰가 스페이스 위버멘쉬에서 진행되는 전시의 일환으로 소프트 포커스 홈페이지에서 진행됩니다.


발레리 티 리 작가는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적 관점을 통해 (억압받은) 목소리와 서사를 탐구하는 작업을 텍스트, 퍼포먼스, 설치, 워크샵 등 다양한 형식을 통해 드러낸다.

Domesticated 9 Tails and Tales 전시 전경, 스페이스 위버멘쉬, 2024


S/F: 발레리 작가님께서는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 관점에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신데요. 이러한 주제를 한 명의 작가로서 어떻게 탐구하기 시작하셨는지 궁금합니다.

VT: 이민자 여성으로서 살아가며 저의 위치성(positionality)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일이 작업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터전을 꾸리고 생활하는 경험은 자연스럽게 제가 어떤 맥락에 속해 있는지, 또 어떻게 이야기를 만들어가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했습니다. 위치성을 구체화하는 것은 제 작업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탈식민주의와 여성주의라는 관점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비가시적 존재들, 특히 억압받은 목소리를 어떻게 형상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와 같은 디아스포라 문학들로부터 영감을 받았습니다. 딕테에서는 원본과의 차이를 통해 스스로를 가시화하거나, 원본에 기댄 부정문 형태의 서사를 만들어나가는데, 이는 경계의 언어를 탐구하는 제 정체성을 구체화하고 표현하는 데 중요한 영감이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관심이 비인간 존재들로 확장되었습니다. 스테이시 엘러이모의 말, 살, 흙: 페미니즘과 환경정의를 통해 근대 의학에서 제시한 폐쇄적 신체 모델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발견하며, 투과적이고 변용 가능한 신체, 그리고 자연과 인공의 경계를 넘나드는 물질적 존재들에 대한 탐구로 나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할머니께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라신 경험을 통해, 한 개인의 위치성이 역사와 어떻게 교차할 수 있는지와 더불어, 에코 페미니즘 맥락에서 어떻게 펼쳐질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이 질문은 작년의 작업 Glossary for the Wild Tongues 이어졌고, 디아스포라 여성들의 서사를 허구적 질병 ‘메두사 신드롬’을 통해 확장하며, 억압받은 목소리가 회복되는 과정을 시각적, 문학적으로 탐구했습니다.


Domesticated 9 Tails and Tales 전시 전경, 스페이스 위버멘쉬, 2024


S/F: 작가님께서는 이전에 포항이라는 해안 도시에서 작업하셨고, 이번에는 부산에서 작업과 전시를 진행하고 계신데요. 포항과 부산이라는 두 도시에서의 경험이 어떻게 달랐는지,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작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말씀 부탁드립니다.

VT: 포항과 부산은 모두 바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도시지만, 작업의 접근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포항에서는 우뭇가사리를 주요 재료로 연구했습니다. 포항은 일제강점기 시대 해녀들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 중 하나로, 우뭇가사리가 군수용 및 산업 원료로 채취되었던 역사적 맥락이 제 재료 연구에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당시 우뭇가사리는 비행기 날개 도색 재료의 코팅이나 가죽 제품의 마무리제로 사용되며, 해녀들과 산업 전반에 큰 가치를 지닌 물질이었습니다.

부산에서는 채집한 자연물과 버려진 망(그물) 같은 인공물을 작업에 포함시키며, 순화된 자연물과 인공물의 경계에 주목했습니다. 예를 들어, 밀랍, 비단과 같은 재료들은 오랜 시간 인간과 공존하며 만들어낸 협력의 자연 재료입니다. 다양한 그물 또한 인공물이지만 자연의 터전에 오랜 시간 공존한 물질입니다. 이러한 경계의 물질들을 통해 비선형적 시간과 언어를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부산 다대포 역시 초국적 이주와 이동의 역사적 맥락을 지닌 지역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으로의 밀항지나 밀수선 근거지로 사용되었고, 예로부터 왜구의 출몰이 빈번한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층위는 경계의 물질을 체화하며, 제 작업에서 9개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상상적 배경을 제시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포항과 부산은 제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네덜란드, 벨기에의 바다 공간과도 차이를 보입니다. 저지대라 불리는 이 지역은 생존을 위한 물의 통제와 간척지 개발이 중요한 역사적 요소로 작용해왔습니다.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와 물질이 지닌 기억과 서사가 지역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Domesticated 9 Tails and Tales 전시 전경, 스페이스 위버멘쉬, 2024


S/F:이번 전시 주제인 “Domesticated 9 Tails and Tales”는 한국어로 번역하면 “길들여진 아홉 개의 꼬리와 이야기들” 정도로 표현될 것 같은데요. 여기서 말하는 아홉 개의 꼬리와 이야기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VT: 이 전시는 옥타비아 버틀러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의 우화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버틀러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타자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는 초공감각 증후군을 가진 취약한 몸을 지녔지만, 이로 인해 지구종이라는 새로운 신념을 만들어갑니다. 저는 취약한 몸과 자생성 사이의 연결을 상상하며 9개의 글/시를 썼습니다.

“아홉 개의 꼬리”는 서로 다른 서사들이 엮여 생성되는 과정의 은유입니다. 꼬리는 길들여진 것과 야생적인 것,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탐구하며, 작업 속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새로운 결로 확장되는 통로를 제공합니다. 동면 속에서 상상한 장면—비단으로 엮인 그물이 동굴에 떨어지고, 각각의 짜임이 시적 패턴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이 작업의 시각적 중심이기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꼬리들은 이야기 자체인 동시에, 그것을 전달하고 확장시키는 도구입니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경계에서 자라는 이야기를 더 멀리 확장하기 위한 은유이기도 합니다.


Domesticated 9 Tails and Tales 전시 전경, 스페이스 위버멘쉬, 2024


S/F: 아직 전시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번 전시는 채집된 요소들이 조각 형태로 변화된 설치물, 그 위에 새겨진 텍스트, 작가님의 말 등 다양한 요소들 사이를 관객이 이동하며 작가의 생각을 조금씩 알게 되는 전시가 아닐까 싶은데요. 특히 텍스트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느껴집니다. 설치 작업에 텍스트를 포함시키는 것에 대한 작가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VT: 제 작업에서 텍스트는 단순히 읽히는 언어가 아니라, 물질적이고 시각적인 경험으로 작동합니다. 밀랍 서판은 오래된 아카이빙 도구이자, 인공물과 자연물 같은 재료가 가진 서사를 담는 매체입니다. 또한 밀랍 서판은 불로 표면을 녹여 다시 사용할 수 있는 특성을 지니고 있어, 다층의 표면 위 글자들이 새겨지고 불로 지워지는 과정을 상상하게 합니다. 이를 통해 서판은 여러 목소리를 담고 있는 몸과도 같은 역할을 합니다.

텍스트를 새기고 엮는 작업은 마치 글씨가 줄기와 뿌리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자연과 비자연, 목소리와 묵음은 서로 교차하며 하나의 패턴으로 확장됩니다. 테레사 학경 차의 딕테에 등장하는 Diseuse—즉, 말하는 여자이자 예언자를 의미하는 개념처럼, 저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새겨지는 음절과, 음절 사이로 굳혀진 넝쿨, 글자의 모양과 같은 줄기 등으로 형상화하고 이를 전달하고자 합니다.


Domesticated 9 Tails and Tales 전시 전경, 스페이스 위버멘쉬, 2024


S/F: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작가로서의 계획이나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알려주세요.

VT: 재료들을 채집하며 방문한 장소로부터, 그리고 재료를 연구하며 영감을 받아 써내려간 조각 글들을 모아, 다가오는 해에 출간하고 싶습니다. 또한 자연 재료들을 더 공부하고, 비인간 존재들로부터 자생적인 태도를 배우고 체화하고자 합니다.

올해 처음으로 한국에서 활동을 시작하였고,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만났습니다. 그 여운을 마음 속에 기록하며, 이를 계기로 한국에서 점진적으로 활동을 늘려나갔으면 하는 바람도 있습니다.

전시 준비를 하면서 지속 가능성과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의존적인 작업 형태 및 재료에 대한 고민을 깊이 했습니다. 레진과 같은 화학적 재료처럼 인간의 힘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재료들을 다루며, 천연 물질들이 주변 환경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과정 속에서 형태와 변주를, 이미 그들이 품고 있는 목소리에 최대한 기대어보고자하는 마음으로 작업하였습니다. 취약하기에 다른 존재에 기대어가고, 기대기 때문에 존재들 사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이 마음이 반딧불이처럼, 희미하지만 계속해서 반갑게 빛을 내길 바라며 작업해 나가고 싶습니다.